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의 천주교 박해 (문단 편집) === 신해박해 === {{{+1 [[辛]][[亥]][[迫]][[害]]}}} [[1791년]]([[정조(조선)|정조]] 15년)에 일어난 박해. 자세한 내용은 [[진산 사건]]도 참고. [[천주교]]는 17세기 즈음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들어왔는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전후해 [[소현세자]] 등 일부 조선인들이 외국 [[선교사]]들을 접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명맥이 이어졌다고 보긴 힘들다.], 당시엔 책으로 소개되어 글을 읽을 수 있는 일부 층에게만 알려졌고, 애초에 당시 서학(천주학)은 [[이익(실학자)|이익]], [[안정복]] 등 실학자들에게 학문처럼 취급되었지 딱히 신앙으로 믿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다 이것이 신앙으로 본격 세력화되기 시작한건 남인 실학 선비들이 믿기 시작한 18세기 후반부터였는데, 특히 서학에서 말하는 인간평등[* 정확히는 [[야훼|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 당시 조선 사람들의 기존 관념이었던 하늘([[天]]) 개념이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으로 일치가 되었기에 수용이 아주 쉬웠다.] 사상은 당시 [[성리학]] 전통 사회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보던 비주류 계층에도 암암리에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다 [[청나라]]에서 [[조선]]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은 [[이승훈 베드로]]를 기점으로, 1784년 [[가톨릭/대한민국|조선천주교회]]가 설립된다. 초기 포교 방식은 신자들이 모여서 그냥 모임이나 [[기도]] 정도만 하는 것이었기에, [[성리학]] 외 타 학문(교리) 배제라는 조선 현실상 천주교가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긴 쉽지 않았으나[* 실제 신해박해 이전부터 일부 유생들이 "천주교 교리가 조선의 성리학 이념에 위배된다"며 위정척사를 내세우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이에 조정이 천주교 서적 수입을 금하기도 했다.], 당시 정조 조정도 "[[불교|불도]]나 [[도교|노도]]도 중국에서 굳이 박해한 적은 없다"[* 물론 정확히 따지면 [[삼무일종법난]]처럼 중국 몇몇 왕조에서 불교를 탄압한 적도 있긴 하지만 그 시기가 길진 않았다.]며 불교의 별파 비슷하게 천주교를 보기도 하는 등[* 두 종교 모두 [[천국]]([[극락]]), [[지옥]]처럼 [[내세]]를 언급하고, 숭배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유학자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 수 있다. 실제 [[채제공]]은 천주교 교리에도 제법 통달했는지 교리를 정조에게 설명하며 천주교 교리 중엔 좋은 말도 있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고 봉사를 눈뜨게 하고 천상의 문을 연다는 식의 [[괴력난신]] 드립도 있다고 디스하자 정조는 이게 다 황당무계한 패관 [[소설]]을 하도 보니까 그런 소리도 믿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오락가락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이 터지면서 조선의 천주교는 위기를 맞게 맞는다. 사건 요지는 이렇다: [[진산]]에 살던 양반 부인{{{-2 (안동 권씨)}}}가 선종하면서 "자기 장례를 치를 때는 절대로 그 어떤 미신행위나 우상숭배행위 같은 요소들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해달라"[* 김수태. 「안동 권씨 부인의 유교식 조상제사 거부」 교회사학 no.13(2016) : 12.]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자 권씨의 아들{{{-2 윤지충 바오로)}}}과 조카{{{-2 (권상연 야고보)}}}는 유언대로 어머니의 신주를 세우지 않고 집안의 나머지 신주들을 지역사회 몰래 불태운다. 그런데 훗날 이것이 들켜 추궁당하면서 박해 사건으로 커진다. 먼저 장례식에서 신주 없는 게 지역사회에 들켰는데, 처음에는 윤지충 측에선 신주를 '묻었다'고 소각을 숨겼지만, 관에서 곤장으로 소각이 실토된 것이다.[* 흔히 윤지충이 동네 사람들 보라고 화려하게 신주들을 불태웠다고 단순화되지만, 후술하듯 윤지충은 그냥 자기 집 신주를 조용히 태우고 가급적 지역 사회와 마찰이 없게 하려 했다. 윤지충이 처음에 신주 소각을 숨기려 한 것은 서양측의 기록{{{- (북경의 구베아 주교의 서신, 1797-08-15, to 사천 대리감목 디디에르 주교)}}}과 실록{{{-2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7일 무인 2번째기사)}}}에서 교차 검증이 된다. 또한 들킨 이후로는 신주 소각의 정당성을 윤지충이 적극적으로 말한 것도 두 계열 기록에서 공통이다.] 또한 여기서 오해가 매우 많은 게 있는데, 편견과 달리 윤지충 처형의 이유는 '제사 폐지' 때문이 아니라 신주 처리 문제이다. 윤지충 스스로도 제사 안 지내고 신주 안 세우는 건 나라에서 금한 적 없다고 변론했고,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 역시도 "신주를 한 조각 쓸모없는 나무라 하여 태워 없애면서도 이마에 진땀 하나 흘리지 않았으니, 정말 흉악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제사를 폐지한 것 등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합니다"라며 신주를 '소각'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조실록, 같은 기사] 오히려 당시 윤지충과 공권력의 논점은 '조상제사 여부'와 '신주 폐지 여부'가 아니라 '이왕 폐지할 거면 묻어야 했다'{{{-2 (조정)}}}와 '소각이 왜 묻는 것보다 나쁜 거냐'{{{-2 (윤지충)}}}라는 매우 예법적인 문제였다.[* 조현범. 「윤지충의 폐제분주(廢祭焚主) 논거에 대한 일 고찰」 종교연구 78, no.1 (2018) : 159.] 아무튼 조선 조정도 발칵 뒤집혀 조사 끝에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했고, 이들에게 천주교를 포교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유배시킨다. 다만 사건이 이 이상 커지는 것은 [[정조(조선)|정조]]도 원치 않았는데, 이에 대해선 정조가 총애하던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고 있는데다[* 다만 이 사건의 영향으로 배교한다. 사실 [[정약용]] 외에도 당시 많은 [[남인]]들이 [[천주교]]를 믿었는데, 때문에 '천주교 박해=정적 숙청'으로 보는 시각도 생긴 것.] 윤지충과 내종사촌 관계라 사실상 정치 싸움이 될 낌새가 보여 그랬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순교]]한 터에는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세워졌고, 이들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복자|시복]]된다. ([[한국 124위 순교복자]]) 한편, 일부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처리한 방식 때문에[* 물론 전제군주정과 성리학이 지배하던 당시 시대상 대비 온건했다는 거고,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저것도 명백한 종교 탄압이긴 하다. 정조 시절의 천주교 대책은 크게 보면 숭유에 기반한 교화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젠 이 교화주의란 것도 결국 세부적으로 가면 배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보니 윗선과 무관하게 혹은 묵인하에 일부 관리들의 배교 강요=장형같은 형벌의 형태를 불러오는 측면이 있었다.] 당시 왕이었던 [[정조(조선)|정조]]가 [[천주교]]에 관대했다거나 심지어 관심이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서학(천주교)은 한 때의 유행일 뿐이니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우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라는 말도 할 정도로 철저한 [[성리학]]주의자였던 정조를 고려하면 딱히 천주교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보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학자간에도 논쟁이 있는 부분. 다만 천주교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정조 입장에선 [[이가환]] 등 측근들도 허구한날 연루되어 있다고 반대파들이 공격하는 소재로 쓰는 종교인데 이걸 완전히 끄집어내어 탄압하는 순간 탕평을 내세우던 자신의 이상은 물 건너가고, 반대로 정조 스스로가 천주교에 긍정적 관심을 가지면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의 질서를 왕 스스로가 부정하는 꼴이 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 그래서 정조는 그냥 눈에 보이는 당장의 불을 끄는 데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정조와 세도가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천주교는 더욱 퍼져나갔고, 이후 4번의 대규모 박해를 겪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